뉴스다 최광묵 기자 |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에서 54년간의 폭격 훈련의 아픔을 딛고, 평화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난 ‘매향리평화기념관’이 21일 정식 개관했다. 기념관은 과거 미 공군의 사격 훈련장이었던 쿠니사격장의 일부 시설을 보존하고,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디자인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개관식은 21일 오후 1시 30분에 진행되었으며, 정명근 화성특례시장을 비롯한 도·시의원과 시민 150여 명이 참석해 개관식을 축하했다.
▲매향리 평화기념관 개관식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화성특례시장 정명근(사진제공= 뉴스다)
매향리평화기념관은 ‘평화의 길, 희망의 바다’를 비전으로 삼고 있다. 이 기념관은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치유와 존중을 통해 평화를 약속하는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기념관 외부에는 회랑과 추모의 위령비, 물이 흐르는 수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매향리 주민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내부는 따스한 빛이 스며들도록 설계되어, 오랜 고통을 겪은 주민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1층에는 어린이체험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빛과 희망, 자유, 평화를 주제로 한 미디어아트와 다양한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다. 아이들은 미로, 퍼즐, 그림책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매향리의 이야기를 접하고 평화의 가치를 배울 수 있다. 2층 상설전시실에는 쿠니사격장의 설치부터 폐쇄까지의 과정, 주민들의 투쟁, 미군 훈련의 실상 등을 담은 다양한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빛과 그림자’를 소재로 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화성특례시는 미군이 사용했던 위병소, 카페, 체력단련실, 사격통제소, 숙소 및 식당, 장교막사 등의 공간을 그대로 존치하여 시민들이 당시의 현장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매향리가 겪었던 과거의 아픔을 역사적으로 되새기고, 그 기억을 이어감으로써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더욱 깊이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매향리평화기념관의 MI(Museum Identity)는 작년 3월 ‘독일 iF 디자인어워드’에서 본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다. 매향리는 원래 ‘매화 향기가 가득하다’는 뜻을 지닌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매향리는 미군의 사격장이 들어서며 평화롭던 일상이 폭격 소리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쿠니사격장 설치 시기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1952년으로 추정된다.
주한미군은 매향리 일대 21만 평 규모의 땅에 사격장을 설치했고, 이후 미 공군기의 기총사격과 연습용 폭탄 투하가 이어졌다. 1968년,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이 체결되면서 미군은 농토 29만 평 육상사격장을 설치하여 ‘쿠니사격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미군은 1980년까지 추가징발을 통해 해상사격장 690만 평, 육상사격장 29만 평, 총 719만 평에 달하는 대규모 사격장으로 확장했다. 이로 인해 연간 약 250일, 하루 600~700회에 이르는 집중적인 사격훈련이 이어졌다.
매향리 주민들은 군용기의 굉음, 포탄 낙하, 화재 등으로 오랜 시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포탄이 농가나 모래사장에 떨어져 사람이 목숨을 잃는 사고도 발생했다. 난청, 주택 파손, 가축 유산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2017년 성공회대 산학협력단이 발간한 『매향리의 역사·문화, 현대사 백서』에 따르면, 사격훈련장으로 인해 8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당했다. 2007년 원진환경건강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매향리 주민들의 자살률은 다른 지역보다 2~7배 높았으며, 고도불안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증세를 보이는 비율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해 무려 9배나 높았다.
▲매향리 평화기념관 개관 기념식을 참석하는 정명근 화성특례시장, 축하공연팀, 매향리 미공군 국제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원회 전만규 위원장(사진제공=뉴스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매향리 주민들은 끈질긴 투쟁을 통해 평화를 얻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전국에 타오르자, 매향리 주민들은 고통 속에 숨겨졌던 목소리를 모아 ‘매향리 미공군 국제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이후 주민 612명이 청와대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1998년에는 전만규 위원장을 포함한 15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들의 아픔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2000년 5월, A-10 지상공격기 1대가 매향리 앞바다와 쿠니사격장에 폭탄 6발을 한꺼번에 투하하는 ‘매향리 오폭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매향리의 오랜 아픔이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공론의 장에 오르게 되었다. 1998년에 시작된 재판은 2001년, 매향리 주민들이 겪은 오랜 고통과 희생을 인정하며 국가의 책임과 배상을 명하는 판결로 이어졌다. 해당 판결은 2004년 대법원에서도 승소 확정판결을 받았다.
마침내 2005년 8월, 주한미군이 ‘쿠니사격장’을 폐쇄함으로써 오랜 역사의 비극은 주민들의 승리와 함께 막을 내렸다. 정명근 화성특례시장은 “매향리 평화기념관은 주민들의 아픔과 용기를 기억하고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매향리 주민의 품으로 돌아온 땅은 상처의 기억을 딛고 평화와 치유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화성특례시는 57만㎡를 평화생태공원으로 꾸며 자연과 치유의 공간으로 재탄생시켰고, 24만㎡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리틀야구장인 ‘화성드림파크’를 건설했다.
매향리 평화기념관은 2019년 착공을 시작해 2021년 준공되어 작년 12월 임시로 개관했다. 평범한 주민들이 만들어낸 역사는 이제 매향리 평화기념관에 고스란히 담겼다. 화성특례시는 시민 참여형 프로그램과 기획전시 등을 통해 기념관이 평화 및 인권 교육의 플랫폼으로 자리잡도록 운영할 방침이다. 기념관은 매주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입장료와 주차비는 무료이다. 20인 이상의 단체관람은 사전예약이 필요하며, 네이버 예약 시스템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전시 외에도 인스타그램 계정(@maehyang_peace_m)을 통해 다양한 평화 콘텐츠와 기념관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정명근 화성특례시장은 “매향리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포탄 아래에서도 삶을 지켜낸 주민들의 눈물과 고통이 켜켜이 쌓인 땅”이라며 “매향리 평화기념관은 주민들의 아픔과 용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평화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되새기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화성 특례시민을 포함해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아 매향리를 지켜온 이야기 속에서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느낄 수 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